전통 직물은 오랜 시간 동안 다양한 방식으로 변형되면서 그 예술적 면모를 유지해왔습니다. 최근에는 이 전통 직물이 하나의 예술품으로서 빛을 발하고 있는데요. 오늘은 한국의 패브릭 아트로 세계적인 작품을 선보이는 4인의 작가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그들의 작품을 감상하는 시간은 섬유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서도호 _ 천으로 만든 기억 속의 집
설치 미술가 서도호는 집을 해체하고 재설치하는 작업물로 전 세계 주요 전시장을 삼십 년 가까이 돌고 있습니다. 그의 작품은 글로벌 유목민, 즉 현대사회에 살며 전 세계를 떠도는 인간이 공간에 대해 갖는 그리움을 정서적으로 표현하고 있는데요.
그의 작품에서 놀라운 것은 공간의 안과 밖, 그 세세한 디테일을 천으로 구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마어마한 스케일의 공간을 입체적으로 만들어 구현하고 모두 다 연결해 붙여 하나의 공간으로 설치 완성합니다. 평면의 천이 입체로, 그것도 거대한 입체로 변신하는 데는 꼼꼼한 재봉질과 철사로 뼈대를 만드는 세심한 작업이 수반됩니다.
그의 대표작 <집 속의 집 home within home>은 그가 미국 유학 시절 살았던 아파트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서울의 한옥을 품은 형태를 보여줍니다. 이 모든 공간을 전선 하나하나까지 설계해 철사로 뼈대를 만들고 인형 옷 입히듯 천을 재단해 입혔습니다. 이 대규모 작업에는 반투명한 패브릭을 이용했는데요. 서양의 집은 폴리에스테르로 한옥은 실크(은조사)로 제작한 디테일이 돋보였고, 이는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그가 주재료로 사용하는 속이 비치는 천은 섬유의 온화함이 추억의 매개체를, 섬유의 유동성은 현대인들의 노마드적 삶을 은유합니다. 무엇보다 <기억 속의 집>을 구성하는 속이 비치는 반투명한 파스텔 색조의 직물은 보는 이들에게 아련한 추억을 불러일으키며 전 세계인의 공감을 얻었습니다. 직물이 주는 온기와 서정이 그대로 전달되고 있는 것인데요. 바느질이라는 공간을 구현하는 스킬 역시 어머니의 손길을 연상케 하며 공간 전체에 온기를 불어 넣고 있습니다. 집과 기억의 환기를 모티브로 다양한 공간을 재현해낸 그의 작품은 지금도 끊임없이 설계되고 있습니다.
김수자 _ 천으로 짐을 감싼 보따리를 주제로 한 작품들
1992년부터 시작된 김수자의 이 작업은 보따리 자체가 가지고 있는 화려한 색감뿐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철학적 사유 때문에 주목 받기 시작했습니다. 보따리는 그 자체로 어디든지 떠날 수 있는 이동을 상징하는 소재인데요. 작가는 90년대 초 뉴욕의 작업실에서 자신의 옷가지를 묶은 보따리를 발견했습니다. 그녀는 이 단순하게 묶인 천 소재 보따리 안에서 떠남과 머묾, 개인과 집단, 단절과 소통의 메시지를 담아내고 있습니다.
이 작업은 설치, 비디오, 퍼포먼스 등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되어 전 세계에 ‘보따리’라는 단어를 펼치게 되었고, 1990년대 중반 이후 세계 무대에서 이 보따리 작업이 널리 알려지면서 '보따리 작가'라고 일컬어지게 되었습니다. 1990년대 후반에 이르러 작가는 보따리를 싸서 트럭에 싣고 전국을 돌거나 중국과 인도를 순례하는 등 좀 더 광의적인 보따리 퍼포먼스와 비디오 아트를 선보이기 시작했는데요. 그녀 작품의 가장 큰 오브제인 ‘보따리’는 규방 문화의 상징이었던 조각보, 이불보, 오방색 등 전통적인 요소를 담고 있어 친숙하면서도 그 천들의 재조합을 통해 미학적 가치를 극대화 시켰습니다.
장연순 _ 동양적 소재의 건축화
장연순 작가의 작품은 현대적인 선과 면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언뜻 보면 매우 모던하다고 느껴지는 이 작품을 가까이에서 보면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데요. 바로 그 작품의 소재가 염색한 삼베, 모시 등 전통 직물이기 때문입니다.
작가는 섬유가 갖는 고유한 특징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빛과 공간의 여백을 이용해 하나의 건축물을 설치하듯 작품을 완성해 나갑니다. 대표작인 <늘어난 시간> 연작 시리즈는 섬유라는 물성이 생물(인간)을 구성하는 최소 단위인 큐브(cube)로 구현해 내었습니다. 이 큐브들이 빛과 공기 중에서 건축물처럼 구조화되는 것이 작품이 핵심인데요. 주요 재료는 마 소재로 염색, 풀 먹임, 봉재 등 12단계를 거쳐 마음을 수행하듯 작품을 구현해 나갑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설계해 만든 작품이지만 결국 본래 소재의 물성 때문에 빛과 공기는 마음대로 이 작품을 통과하고 유영하며 무생물 안에 생명을 불어넣습니다.
즉 작가는 자신의 작품 속에서 몸, 마음을 넘나드는 공기와 빛을 통해 동양적인 해탈의 정신세계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녀는 이화여자대학교 섬유예술 전공 교수로 재직했으며 국내 최고의 섬유 공예가로 평가받고 있는데요. 그녀의 작품 중 다수는 해외 유명 갤러리에서 소장하고 있으며, 한결같이 동양적 철학과 서양적 외형, 동양적 소재와 서양적 건축미를 갖춘 작품이라고 극찬하고 있습니다.
함경아 _ 사회적 메시지를 자수에 담다
작가 함경아의 보폭은 큽니다. 또한, 그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아주 드넓은 곳입니다. 세계 곳곳을 누비며 그곳의 사회상을 작품으로 담아낼 수 있는 '글로벌 아티스트'. 또한 여성 작가에게서 좀처럼 보기 힘든 스케일로 거침없이 '지르는' 작가인데요. 그녀를 한마디로 규정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회화 작가, 비디오 아티스트, 설치 미술가. 한마디로 그녀는 사회적 메시지를 작품에 담고자 하는 종합 예술입니다.
<유령 발자국 Phantom Footsteps>이라는 타이틀을 건 작년의 개인전은 압도적 크기의 화면들이 연작으로 내걸려 있는 그 구성에 감탄사가 절로 나왔습니다. 하지만 더 놀라웠던 건 이 파워풀한 작품 제작 과정과 대형 화폭을 가득 담은 화려한 컬러의 회화 작품이 알고 보면 자수 회화였던 것인데요. 작가가 다양한 이미지들을 콜라주하여 화촉 위에 디지털 프린팅으로 얹고 그 도안에 따라 한 땀 한 땀 자수를 놓아 완성한 것입니다. 다양한 색으로 자수를 놓은 화폭은 거대하고도 압도적인 힘을 느끼게 합니다. 신인상주의파의 점묘화를 연상케 하는 작품들은 자수라는 매개를 통해 회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 것입니다.
끊임없이 다양한 시도를 하는 함경아의 자수 회화는 그녀의 도전 정신과 확정성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수 회화의 놀라운 점은 컴퓨터 그러니까 디지털 세상에서만 볼법한 색채 이미지를 수공예의 대표 격인 자수로 구현했다는 반전 미에 있습니다. 디지털 신호를 아날로그 신호로 번역한 것인데요. 게다가 이 자수를 북한 자수가들에게 의뢰했다는 것 또한 이 작품을 새롭게 주목하게 한 이유입니다.
현란한 자수 회화가 폐쇄적인 사회주의 국가에서 완성되는 과정까지 그 모든 과정이 유의미하게 작품 속에 담겼기에 그녀의 작품이 사회에 내던지는 메시지 울림이 큰 것입니다. 올해 홍콩 바젤 페어에도 그녀의 자수 회화 중 5개의 대규모 샹들리에 시리즈가 선보여 높은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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