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잘 왔어. 와인 한잔해. 얼음 줄까?”
지중해가 내다보이는 남프랑스 이에르(Hyères)의 별장. 화이트 와인을 건네는 친구의 물음에 순간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어요. 한국에선 쉽게 생각하기 힘든 제안이었거든요. 와인 잔에 얼음을 넣는다니, 한국에선 일종의 금기처럼 여겨지곤 하잖아요. 와인 맛의 밸런스를 깨트리고, 적정 온도를 해치고, 귀한 와인을 망치는 일이라면서요. 그래서 슬쩍 장난스럽게 물어봤죠.
“귀족들도 와인에 얼음 타서 마셔?”
프랑스 귀족인 친구는 깔깔 웃음을 터뜨리더라고요.
“귀족은 와인에 얼음 타 마시면 안 된대? 여름엔 다들 이렇게 마시잖아!”
둘러보니 다들 잔 속에 얼음을 동동 띄워 마시고 있었어요. 와인은 모름지기 격식을 차려 마셔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남프랑스의 뜨거운 햇살 아래서 순식간에 녹아내린 순간이었죠. 우리는 왜 그동안 와인을 이렇게까지 어렵게 마셨던 걸까요? 여름 와인이 주는 진짜 즐거움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됐습니다.
지중해의 더위가 만들어낸 지극히 실용적인 지혜

지중해의 강렬한 태양 아래서 로제 와인이나 샴페인을 마시다 보면 금방 미지근해집니다. 게다가 알코올 기운이 평소보다 훨씬 세게 올라오죠. 한낮부터 도수 높은 술을 그대로 마시는 건 야외 활동이 많은 여름철에 은근히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그래서 현지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와인에 얼음을 타서 가볍게 마시는 방법을 찾은 거예요.
남프랑스에서 와인에 얼음을 넣어 마시는 건 거창한 문화라기보다, 더위를 피하려던 현지인들의 지극히 실용적인 지혜에 가깝습니다. 얼음 가득한 잔에 와인을 부은 모습이 마치 수영장 같다고 해서 ‘피신(piscine, 수영장)’이라는 이름이 붙었죠. 브리짓 바르도 같은 당대의 셀럽들이 즐겼다는 식의 로맨틱한 소문도 따라붙지만, 실상은 현지인들의 소소한 더위 사냥법을 훗날 브랜드들이 라이프스타일로 재해석해 낸 결과물입니다.
사실 와인을 물이나 얼음에 타 마신 역사는 생각보다 훨씬 오래됐어요. 냉장 기술이 없던 고대 로마나 그리스에서도 와인 향과 맛이 너무 강해서 눈이나 물을 섞어 마셨다는 기록이 있거든요. 어찌 보면 얼음을 타 마시는 게 가장 고전적인 음용법 중 하나인 셈이죠.
얼음과 와인, 똑똑하게 만나는 법

그렇다고 아무 와인에나 얼음을 던져 넣어도 된다는 뜻은 아니에요. 오크 향이 아주 강하거나 탄닌이 빡빡한 레드 와인은 피하는 게 좋습니다. 차가운 온도와 물이 만나면 와인 구조 감이 단번에 무너지면서 과실 향은 싹 묻히고 씁쓸한 맛만 둥둥 뜨거든요.
얼음을 넣을 땐 중심을 딱 잡아주는, 탄탄한 골격이 있는 와인을 고르는 게 좋습니다. 산미가 살아있고 과실 향이 풍부한 화이트나 로제 와인이 딱이죠. 그렇다고 굳이 비싼 빈티지를 찾을 필요도 없습니다. 막걸리에 얼음 동동 띄워 마시듯, 캐주얼하게 즐기기 좋은 가격대면 충분해요. 색다른 재미를 주고 싶다면 얼린 포도 알맹이를 넣어보는 것도 추천합니다. 와인과 같은 뿌리인 포도가 와인이 싱거워지는 걸 막아주면서 달콤한 디저트가 되어주거든요.
격식보다 즐거움이 우선인 여름
한국이었다면 시원한 오이냉국이나 평양냉면 한 사발 들이켜면서 더위를 식혔겠죠. 하지만 지금 남프랑스에선 얼음이 녹아 은은해진 와인 한 잔으로 이 계절의 열기를 달래고 있습니다.
와인은 결국 우리를 즐겁게 만들려고 존재하는 음료잖아요. ‘와인은 무조건 이렇게 마셔야 해’라는 강박이 여름밤의 낭만을 막고 있다면, 오늘은 과감하게 잔에 얼음 몇 개를 떨어뜨려 보세요. 타인의 시선이나 거창한 에티켓을 내려놓는 순간, 계절을 온전히 즐기는 자유로움이 잔 안에 차오를 테니까요.
Written by 김인애 (럭셔리&컬쳐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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