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람의 온도가 달라졌습니다. 코끝을 스치던 서늘함이 어느새 볼을 감싸는 부드러움으로 바뀌고, 거리마다 꽃들이 한꺼번에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는 5월. 가정의 달이 건네는 질문은 그리 거창하지 않습니다. 함께 밥을 먹고, 서로의 안부를 묻고, 아무 말 없이 같은 시간을 공유하는 것. 그 고요한 식탁 위에 말보다 먼저 마음을 전하는 따스한 한 잔이 놓인다면 어떨까요.
비노파라다이스가 이번 5월에 건네는 이야기는, 뉴질랜드 말보로의 와이너리 폴리움(Folium)입니다. 자연의 섭리를 따르며 와인을 빚는 이 작은 포도밭의 철학과, 그 철학이 빚어낸 와인들을 만나봅니다.
세 대륙을 건넌 와인메이커
잎 하나에 깃든 양조의 철학

폴리움의 와인메이커 타카키 오카다는 일본에서 태어나 미국 UC Davis에서 양조학을 공부하던 중, 우연히 마신 뉴질랜드 와인 한 잔에 이끌려 말보로로 향했습니다.
앙리 부르주아가 운영하는 '끌로 앙리(Clos Henri)'에서 여섯 해의 빈티지를 쌓으며 유럽의 전통 양조법을 남반구의 토양 위에 옮겨 심는 법을 익혔고, 2011년 마침내 자신의 이름으로 포도밭을 일궜습니다.
그가 가장 먼저 정한 원칙은 단 하나, '한 알의 포도도 허투루 다루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폴리움(Folium)은 라틴어로 '잎'을 뜻합니다. 오카다는 이 이름에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지 않겠다'는 의지를 담았습니다.
한 장의 잎이 머금는 햇빛의 양만큼 포도의 향과 결이 달라지기에, 풍성한 잎 트레이닝으로 충분한 광합성을 꾀하고, 염소와 닭, 벌이 함께하는 생명의 장으로 포도밭을 가꾸어 2012년 Biogro 유기농 인증을 받았습니다.
브랑콧 밸리의 척박한 땅에서 깊이 뿌리 내린 포도는 10kg의 작은 상자에 담겨 수확됩니다.
송이째 압착해 과육의 신선함을 살려내고, 스테인리스 스틸에서 발효한 뒤 효모와 함께 열한 달을 천천히 숙성합니다.
더하지 않고, 본질만 남기는 것. 그것이 폴리움의 양조입니다.

폴리움(Folium)의 첫인상
잔 안에 피어난 5월의 과실미
폴리움의 화이트 와인, 소비뇽 블랑. 이 한 잔에서 폴리움의 철학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잔을 기울이면 가장 먼저 눈에 닿는 것은 빛깔입니다. 옅은 그린 톤이 감도는 밝은 옐로 컬러.
5월의 늦은 오후, 창문 사이로 비스듬히 들어오는 햇살을 머금은 듯한 청량함이 잔 안에 머물고 있습니다.
코를 가까이 가져가면 레몬의 상큼한 시트러스가 가장 먼저 피어오릅니다. 이어서 잘 익은 패션프루트와 구즈베리의 생동감 있는 열대과일 향이 겹치며, 청사과와 허브의 신선한 뉘앙스가 향의 윤곽을 또렷하게 그려냅니다. 향의 명확도와 집중도가 매우 좋아, 코끝에 대는 것만으로도 브랑콧 밸리의 바람이 느껴지는 듯합니다.
한 모금 머금으면, 무겁지 않으면서도 입안을 또렷하게 가로지르는 크리스탈 같은 산미가 감각을 깨웁니다.
그리고 그 끝에서 산뜻한 자몽의 터치와 허브의 잔향이 깨끗하게 여운을 남깁니다.
가벼움 속에 선명함을 숨기고 있는 이 한 잔이, 폴리움이라는 와이너리를 가장 잘 설명해 줍니다.

같은 철학, 다른 빛깔
폴리움이 품고 있는 다채로운 모습
같은 철학, 같은 포도밭에서 태어났지만 품종과 양조법에 따라 전혀 다른 표정을 보여주는 와인들이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은 대화가 필요한 저녁이라면, 폴리움 샤도네이를 권합니다. 오직 1,200그루에서만 수확하는 극소량의 와인. 배와 복숭아, 감귤류의 대담한 향에 자몽의 뉘앙스와 감각적인 산미, 크리미한 바닐라와 은은한 토스티함, 향신료 향이 복합적으로 피어납니다.

햇살 좋은 오후라면 폴리움 로제가 어울립니다. 피노 누아 100%로 빚은 살몬 핑크빛 한 잔. 신선한 라즈베리와 크랜베리, 햇 복숭아의 과실 향에 달콤한 살구와 허브 뉘앙스가 더해지고, 후미의 섬세한 타닌이 드라이하게 마무리됩니다.

고요한 밤에는 폴리움 피노 누아를 꺼내보세요. 야생 딸기와 체리, 약간의 타르 향이 향긋하고 달콤합니다. 달콤한 블랙 체리, 블루베리의 신선한 과실 향에 대황, 시나몬 등 스위트 스파이스가 어우러지는 부드러운 한 잔입니다.

전혀 다른 깊이를 원한다면 리저브 라인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소비뇽 블랑 리저브는 30년 이상 올드바인에서 태어난 와인. 잘 익은 감귤류와 자몽, 꽃 향이 강렬하게 피어나고, 캔틸루프 멜론과 꿀 노트, 토스트 향과 캐슈너트가 어우러지는 새로운 차원의 소비뇽 블랑입니다. 피노 누아 리저브는 체리와 레드커런트, 자두의 검붉은 과일 향에 스파이스 노트와 말린 꽃 향이 가볍게 감싸는 우아한 한 병입니다.

그리고 특별한 날을 위해 아껴두고 싶은 한 병, 폴리움 레이트 하베스트. 2022년 기록적인 비가 만들어낸 보트리티스 와인입니다. 패션프루트, 살구와 복숭아, 애플망고의 풍요로운 단맛에 바삭바삭하게 선명한 산도가 균형을 잡아줍니다.

오래 곁에 둔 마음처럼, 말 대신 건네는 5월의 한 잔
오래 곁에 둔 마음일수록 더 또렷이 닿는 법입니다. 세 대륙을 건넌 양조가의 섬세함, 척박한 땅을 견딘 포도나무의 생명력, 한 알도 허투루 다루지 않은 정성. 폴리움의 와인에는 그 모든 시간이 고요하게 흐르고 있습니다.
5월의 어떤 순간이든, 그 자리에 어울리는 폴리움이 있습니다.
이번 봄, 비노파라다이스가 건넨 이 작은 와이너리의 세계 속에서 당신만의 한 잔을 찾아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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