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속화라는 것은 당대의 삶을 그대로 옮겨 적은 비주얼 랭귀지입니다. 사진이 귀하던 시절 화가들은 민중의 일상을 화폭에 담았고 오늘날 이를 통해 우리는 한국의 과거 풍속을 가늠할 수 있게 되는데요. 조선시대의 풍속화를 살피다 보면 눈에 띄는 것 중 하나가 한국의 술 문화입니다. 사람과 사람 간의 정을 돋우고 놀이의 흥을 더하는 도구로서의 술이 풍속화 속에 고스란히 담겨있는데요. 당대 최고의 화가인 신윤복은 이런 시를 읊은 적이 있을 정도입니다. ‘좌상에는 손님들이 항상 가득 차 있고, 항아리에는 술이 비지 않는다.’ 오늘 파라다이스 블로그에서는 조선시대 최고 화가들의 풍속화를 현대 일러스트레이터들의 손길을 통해 재발견해 보겠습니다. 그 속에 담긴 한국의 술 문화를 통해 한국인의 위트와 해학을 접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新 단오풍정> 일러스트레이터 김시훈
보통 ‘단오풍정’의 여인들은 두 가지로 기억됩니다. 반라로 목욕을 하는 무리, 붉은 치마를 입고 그네를 타는 여인. 하지만 일러스트레이터 김시훈은 일반적 관점에서 과감히 탈피했습니다. 원작에서는 화면의 하단에 밀려나있던 한 여인. 즉 술병을 이고 여인들의 무리(아마도 기생들일 것으로 추측되는)에게로 향하는 푸른 치마에 앞치마를 한 하녀에게 주목했습니다. 그 여인의 등장으로 인해 이 여인들의 파티가 향후 더욱더 흥겨워 질 것임을 부각하고자 한 것인데요. 결국 일러스트레이터 김시훈의 손끝에서 이 하녀는 풍성하고도 푸르른 치마를 입고 붉은색 보자기를 머리에 인 볼륨감이 강조된 계곡의 여왕으로 변신했습니다. 게다가 술을 받쳐든 손길, 풍만한 뒤태가 매우 섹시하기까지 하네요!
<新 삼추가연> 일러스트레이터 김유정
이 작품은 원작인 신윤복의 ‘삼추가연’을 단순화된 선으로 동화적으로 표현했습니다. 컬러는 최대한 자제해 인물과 국화를 한 앵글에 잡았습니다. 키가 큰 노란 국화를 통해 이 모든 인연이 행복이라는 고리 안에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느껴지는데요. 또한 젊은 남녀의 가운데에서 술잔을 건네며 매파 역할을 하는 노파의 치마를 국화와 같은 노란색으로 표현함으로써 밝은 긴장감을 더합니다. 신윤복의 원작이 인물의 표정에 방점이 있다면 일러스트레이터 김유정의 작품은 둥글게 놓인 꽃과 인물의 하나된 배치에 있는데요. 여기에 작가는 술병에 반쯤 담긴 술을 초록색으로 표현했습니다. 마치 반쯤 비워진 술이 새롭게 시작된 인연의 정도를 나타내는 느낌입니다. 작품의 오른쪽 상단에 당나라 원진의 ‘국화’라는 시를 배치한 것은 원작과 동일한데요. 그 중 마지막 구절이 의미심장합니다.
‘꽃 중에 유달리 국화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나, 이 꽃이 지고 나서 다시 꽃은 없으리라.’
<新 벼타작> 일러스트레이터 이용택
이 작품은 ‘벼타작’이라는 김홍도의 작품을 주제로 했습니다. 농경사회의 노동이라는 것이 현시대와는 다르게 해학과 여유가 있었다는 걸 느끼게 하는 팝아트적인 작품인데요. 단원의 그림 속에는 열심히 벼를 털고 지게로 나르는 여러 명의 머슴이 등장합니다. 신윤복의 이 그림을 처음 대하면 이 활기찬 노동의 장면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게 보통입니다. 하지만 이용택 작가는 노동자들의 뒤에 한량처럼 다리를 꼬고 비딱하게 누운 한 남자. 술에 취해 신을 벗고 곰방대를 물고 갓마저 비뚤게 쓴 마름을 주제로 해 원작을 패러디했는데요. 특히 술병의 컬러를 강조했습니다. 이로써 감독관의 성격, 여유롭고 위트 넘치는 넘치는 모습이 부각되었습니다.
<新 기산풍속도> 일러스트레이터 이강인
조선시대 풍속화가 김준근의 기산풍속도를 들여다보면 당대 사람들을 묘사한 그림일기장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팽이치기, 활만들기, 탈춤놀이 등 한국의 놀이와 일상을 세세히 묘사했기 때문인데요. 그 중 일러스트레이터 이강인은 줄타기를 주제로 한 기산풍속도를 새롭게 재탄생시켰습니다. 원작 역시 술상을 앞에 두고 풍물패가 악기를 연주하고 줄타는 광대는 공중을 가르는 흥겨운 작품. 여기에 이강인은 모인 사람들 사이를 관통하는 ‘흥’을 동화적 판타지로 더했습니다. 술상을 사이에 두고 꽃과 나비가 넘실대는 상상이 바로 그것입니다.
<단오풍정> 신윤복
│단오풍정 / 28.2*35.2cm 간송미술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익숙한 명작 ‘단오풍정’입니다. 조선시대의 풍류를 묘사한 화가 신윤복의 작품 중에서도 여인들의 놀이를 제대로 묘사했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높은데요. 짧은 삼회장 저고리와 풍성한 치마 등 당대의 의상, 그네와 멱감기 등 당대의 놀이 문화까지 한눈에 들어옵니다. 또한 여인들의 풍류에도 술이 빠지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한데요. 술을 이고 뒤돌아 걸어가는 한 여인을 통해 이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머리에 이고 있는 쟁반 안에는 술뿐만이 아니라 여인들이 좋아하는 간식과 안주가 그득할 것입니다. 강렬한 원색으로 묘사된 그네 뛰는 여인, 개울가에서 목욕하는 반라의 여인들, 그리고 바위틈으로 숨어 훔쳐보는 동자승 등이 수려한 계곡 안에 아름답게 배치된 신윤복 작품의 백미입니다.
<삼추가연> 신윤복
│삼추가연 / 28.2*35.6cm 간송미술관
삼추가연은 ‘가을에 맺은 세 사람의 인연’이라는 뜻의 작품입니다. 사람의 표정을 묘사하는 데 뛰어났던 화가 신윤복의 천재성이 드러나는 그림인데요. 노파는 한 손으로 선비에게 술잔을 건네며 귓속말을 하고 있습니다. 하녀에게 뭔가 은밀한 당부를 하는 모양새. 어린 귀공자는 알상투 차림이고 시선은 어린 하녀에게 가있습니다. 세 사람 사이의 이야기는 가을의 노란 국화 더미 속에서 이루어지는데 노파가 선비에게 건넨 술잔과 그 뒤의 호리병이 이 남녀를 이어주는 매개체가 됩니다. 특히 주목할 것은 이 술잔과 술병이 고려청자라는 것인데요. 당대 권세가들이 고려 청자에 술을 마셨음을 알려주는 대목입니다. 술, 꽃향기, 가을과 남녀의 연분. 그 모든 것이 한 화폭에 담겨있는 아름다운 작품입니다.
<벼타작> 김홍도
│벼타작 / 단원풍속도첩, 국립중앙박물관
널리 알려진 단원 김홍도의 작품은 대체로 <단원풍속도첩> 안에 담겨있습니다. 그의 작품은 남성적이고 거침없는 선으로 유명한데요. 게다가 그의 역동성을 따라갈 자가 없었습니다. 특히 ‘벼타작’은 곡식을 탈곡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남성적 작품으로 유명합니다. 게다가 한 화폭 안에 일하는 자와 부리는 자를 같이 배치했는데요. 열심히 곡식을 탈곡하는 하인들과 자리를 깔고 누워 담배를 물고 여유를 부리는 감독관의 극대비. 그 옆에 놓인 술 담긴 호리병은 머슴을 부리는 자의 자세를 강조하기 위한 장치입니다. 술에 취해 비스듬히 누워있는 마름과 윗옷을 벗고 일하는 머슴의 모습을 통해 화가는 조선시대의 불공평한 신분제도를 풍자하고자 했습니다. 이 작품 속에서 ‘술’은 신분의 차이를 가장 극명하게 강조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었네요.
<기산풍속도> 김준근
│기산풍속도 / 해외 소장
1900년대 조선시대의 풍속을 그리던 화가 김준근의 작품은 해외에서 더 많이 만날 수 있습니다. 조선의 풍속을 수출화라는 명목으로 생산했던 작가 김준근의 작품은 그래서 더 현실적이고 다양한 생활상을 담아내고 있는데요. 그의 작품에는 놀이 문화뿐 아니라 형벌을 받는 장면, 제사를 지내거나 결혼을 하는 모습까지도 세세히 묘사되었습니다. 서민들의 생업에서부터 무속, 신앙, 제사, 세시풍속, 관아행정과 형벌까지도 그의 그림의 주제가 되었는데요. 그러다 보니 술이 등장하는 일도 잦은데 보통 관아행정과 형벌을 제외하고는 술상이 등장하는 일이 잦습니다. 그만큼 한국의 문화에 술은 ‘가양주’라는 전통으로 대대손손 전해지는 일상 문화였기 때문인데요. 위에 소개된 기산풍속도의 하나인 ‘줄타기’에도 어김없이 술상이 등장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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