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마트나 편의점에 밀려 점점 자리를 잃어가는 한국의 작은 슈퍼마켓들. 이미경 작가는 사라져가는 ‘구멍가게’들을 20여 년간 그려내고 있는데요. 섬세한 펜촉으로 정교하게 담아낸 그녀의 그림은 단순한 풍경이 아닌, 우리의 추억이 담긴 인생의 한 페이지 같죠. 이미경 작가를 만나 구멍가게를 그리게 된 계기와 취재기, 기억에 남는 슈퍼까지. 흥미로운 작품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다.
│At Chilseong-myeon, 2018
Q. 어떻게 구멍가게를 작품 소재로 삼게 되었나요?
복잡한 서울에 살다가 좀 더 여유로운 퇴촌으로 이사를 했는데, 근처에 슬레이트 지붕의 구멍가게가 있었어요. 붉은 페인트로 음료수라고 쓰인 유리 문, 그 사이로 보이는 온갖 잡동사니들, 먼지 쌓인 나무의자, 지금 보면 심심하리 만치 단순한 형태의 외관을 가진 곳이었죠. 군것질거리 외에 문구류도 팔고 있어 자주 들리게 되었는데, 어느 날 문득 그곳을 그리고 싶어졌어요. 그림으로 표현된 구멍가게는 더욱 따뜻했고 정겨웠습니다. 그림에 있어 그동안 간과했던 심미적 영역을 제게 일깨워 줬어요. 저 스스로 가치관에 대한 변화가 일어났죠. 그 이후 주변의 가게들을 눈여겨보게 되었고 구멍가게 그림도 하나, 둘 쌓였습니다. 지금은 점점 사라져 가는 가게들을 기록해야겠다는 사명감으로 더욱 열심히 찾고 남기고 있어요.
Q. 많은 도구 중에서 펜을 선택한 이유가 있나요?
처음 펜촉을 사용해 그림을 그린 건 중1때였어요. 지휘자 카라얀의 얼굴을 파란 잉크를 찍어 그렸죠. 이때부터 펜촉의 섬세함과 날카로움이 주는 매력에 빠졌습니다. 대학 졸업과 동시에 결혼하고 임신과 출산을 하면서 유화나 아크릴로 그림을 그리기에는 여러 가지 제약이 있었어요. 강한 물감 냄새도 그렇고 자투리 시간에 쉽게 펼쳐 작업하려면 여간 번거로운 게 아니었죠. 그래서 자연스럽게 어려서부터 친숙했던 펜을 작업 도구로 삼게 됐어요. 색을 내기 위해 붓으로 한번 칠하면 될 것을 펜은 몇백 번이고 겹겹이 선을 그어야 하지만, 몇십 년을 그리다 보니 펜촉이 내 손가락이 연장된 듯 익숙해요. 이제 그런 고행의 과정마저 즐기게 됐습니다.
Q. 구멍가게를 그리는 작업 과정이 궁금해요!
일 년에 두세 번 정도 여행을 해요. 그러다 마음에 드는 가게가 있으면, 주인에게 작가라고 소개하고 그곳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사진도 찍죠. 외관부터 지붕, 가게 앞의 나무, 휴지통, 평상, 우체통, 문틀 등 이미지 채집에 가깝게 자세히 찍습니다. 작업실로 돌아와 사진을 보며 그릴 가게를 찾아요. 나무 그림자가 드리워진 가게 담벼락에 매혹되어 그리기도 하고, 가게 지붕이 아름다워 그리기도 하죠. 또 그리고 싶은 부분에 다른 이미지들을 짜 맞추기도 해요. 쉽지 않은 작업인데요. 지붕이나, 나무, 빗자루, 우체통 등 하나하나가 색과 구도에 맞게 적당히 배치하는 과정을 거치죠. 이 구상 단계에 꽤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편이에요.
보통 20여 곳을 촬영해도 한 곳 정도가 그림의 소재로 쓰여요. 구상이 끝나면 캔버스가 아닌 종이를 씌운 화판에 스케치를 합니다. 이때 종이에 자국이 남기 때문에 0.3H 샤프를 사용해요. 그리고 펜대에 펜촉을 끼우고 그리기 시작하죠. 잉크는 배합을 통해 80여 개의 색을 만들어 사용하고요. 여러 번 펜촉을 갈아주며 긴 작업을 이어가죠. 한 작업을 보통 서너 번에 나눠 그리는데요. 벽에 걸어두고 보면서 과하거나 부족하지 않게 계속 확인합니다. 완성되면 아크릴릭 워터프루프, uv 스프레이 등으로 표면을 코팅해 작품을 수분과 자외선으로부터 보호합니다.
Q. 이제껏 그려 온 구멍가게 중에서 기억에 가장 남는 곳이 있다면 어디인가요?
역전의 명수로 알려졌던 군산상고 뒤 <석치상회>가 가장 기억에 남아요. 4평 남짓한 가게를 80살이 넘은 할아버지가 40여 년간 지키고 계셨죠. 정갈하게 정리된 가게 안과 반질반질 닦인 나무 선반에서 할아버지의 부지런함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하얀 백발에 넉넉한 웃음이 속세와는 연을 끊은 신선 같아 보이기도 했죠. 또 들러야지 했는데 몇 년 후 상회가 문을 닫았고, 그 앞으로 큰 도로가 생기면서 가게는 완전히 사라졌다고 해요. 이후 가게를 지키던 할아버지도 돌아가셨다고 들었습니다. 한 사람의 생애를 온전히 담고 있던 그 가게가 아직도 기억에 남아요.
│Red Plum Blossom Shop, 2018
Q. 구멍가게를 그리며 우리나라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녔을 것 같아요. 추천하고 싶은 마을이 있나요?
구멍가게가 남아있는 곳은 사실 개발이 안 된 곳이에요. 외지인이 드나들고 사람의 발길이 잦은 곳에는 구멍가게보다는 편의점과 대형마트가 있죠. 그래서 저는 한적한 곳, 현지 사람들이 오랜 시간 삶의 터전을 일구어 온 마을을 찾아다녀요. 개인적으로는 충북 단양, 완주 화암사, 진안 운일암, 봉화 사미정 계곡, 경주, 함평, 안동 하회마을, 해남 북일면 등이 좋았습니다.
Q. 구멍가게는 사람들에게 어릴 적 추억을 떠올리게 만들잖아요. 개인적인 기억 속 구멍가게는 어떤 모습인가요?
어렸을 적엔 부모님이 맞벌이하셨기 때문에 시골에 계신 할아버지 집에 맡겨졌어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등잔불을 켜야 할 만큼 산골 마을이었죠. 이후, 부모님이 서울에 자리를 잡게 되면서 가족이 모여 살게 됐는데요. 갓 시골에서 올라온 저에게 동네 구멍가게는 별천지 같은 곳이었습니다. 특히 해가 저물고 동네가 어두워져도 가게 앞 전봇대 가로등은 훤하게 밝았기에, 동네 아이들의 놀이터였죠. 단순한 마켓을 넘어 환상과 즐거움이 가득한 곳. 물건을 파는 게 아니라 이야기를 파는 곳이었습니다.
Q. 얼마 전 영국 BBC에 <사라져가는 한국 슈퍼들의 매력>이라는 기사와 함께 작품이 소개되었어요. 그림을 본 외국인들의 반응은 어떤가요?
그들은 한국에서 오랜 시간 대를 이어 운영이 되던 작은 가게들이 문을 닫고, 그 자리를 현대적인 마트들로 채워지는 것에 대해 아쉬워했어요. 새로 생긴 마켓들은 더 크고 깨끗하고 편리하지만 예전의 지역적인 매력과 따뜻한 정서는 찾아보기 힘들어졌다고 보도했죠. 오래된 추억의 장소가 사라지면서 느끼게 되는 상실감은 국적 불문하고 누구에게나 있는 듯합니다.
Q. 앞으로 구멍가게가 아닌 다른 추억을 그려낼 계획이 있나요?
바람이 있다면 구멍가게들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것이에요. 때문에 좀 비싸더라도 저는 집 옆 구멍가게를 자주 이용하는데요. 이런 작은 행동이 우리의 추억을 지켜줄 거라 믿기 때문이죠. 구멍가게 외에도 약방, 방앗간, 정미소, 문방구, 책방, 시장 등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여러 공간들에 관심이 많아요. 사람들에게 잊혀 가는 공간과 사물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하고 싶습니다.
│이미경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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