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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가장 큰 축은 잠자리와 먹거리입니다. 결국 이 두 가지를 모두 갖춘 숙박 시설이 여행의 모든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잠자리, 먹거리, 오락 문화까지 오감을 아우르는 곳이며 사람을 대하는 자세가 고스란히 드러난다는 점에서 지역 문화의 속살이라 칭할 만합니다. 


한국은 예로부터 ‘사랑채’라는 곳에서 손님들을 맞이했습니다. 한마디로 집주인이 거주하면서 손님이 오면 온갖 예를 다해 접대하는 장소인 것인데요. 조선시대에 확연히 드러나는 이 사랑채는 본채와 독립돼 지어지는 곳이라 중상류 계층의 주택에서 볼 수 있는 고급 양반 문화였습니다. 상하층, 남녀간의 구분이 엄격하던 당시엔 안채와 사랑채를 분리시켰으며 남자 주인은 사랑채에 머물며 자신의 손님들을 대접했습니다. 한마디로 시대정신이 반영된 주거 문화의 화룡정점인 것입니다.


가장이 거주하며 가족 생활의 일부가 이곳에서 이루어지기도 하였으나 ‘접객’을 위한 효율적인 활용이 매우 돋보였습니다. 특히 종가의 사랑채는 씨족 문화를 완벽하게 구현했는데요. 집성촌에서 가문을 대표하는 종가의 사랑채는 손님의 왕래가 잦고 일가친척 외에 다른 가문들의 방문도 많아 그야말로 현대의 고급 호텔을 방불케 했습니다. 당시의 손님은 짧게는 하루 이틀, 길게는 한 달 이상씩 머물기도 했으니 자연스레 접대 문화가 발달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사랑채에는 정갈한 잠자리와 음식, 그림과 책, 그리고 예를 중시하는 섬김의 미학이 조화를 이뤘는데 이를 잘 들여다 보면 한국 숙박 문화의 근간이 되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게다가 장인들의 기품 있는 손맛으로 공간이 구성돼 풍류를 즐기고 휴식을 취하기 가장 완벽한 구조이니 건축적 의미에서도 그 가치가 매우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



쉰다는 것은 사람이 나무에 기대어 있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지친 심신에 평화를 주는 것은 뭐니뭐니해도 나무, 그린, 숲, 맑은 공기에 있다는 것인데요. 


사랑채에는 연못과 화목으로 가꾼 정원이 존재했습니다. 하지만 주목할 것은 이 정원이 아닙니다. 한국에서는 풍광을 즐길 수 있는 곳에 택지를 정해 인위적이지 않은 본래의 자연 그 자체를 끌어 들여 손님들의 피로를 풀어 주었습니다. 조선 시대 선비들의 자연관은 집 안에서도 먼 곳의 자연을 감상하는 것이었는데요. 건물은 자연의 경관을 해치지 않는 조화로운 모습으로, 그 건축물 안에서 분합문을 열면 뒷산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 오도록 지어졌습니다. 대청이나 누마루의 창호는 위로 들어 천장에 매달아 놓는 형태로 만들어 지곤 했는데 이렇게 하면 사방이 훤히 뚫려 아름다운 자연을 보며 풍류를 즐기는데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합니다. 이렇게 사랑채는 절로 시를 읊고 음악을 흥얼거리게 되는 완벽한 휴식과 낭만의 공간이었던 것입니다. 



 

먼 곳에서 와서 당일로 돌아가기 힘든 손님을 위해 이불과 요강을 갖추고 한 주에서 길게는 수개월을 머물 수 있도록 잠자리를 제공하는 것이 사랑채의 서비스 문화입니다. 규방 문화의 꽃이자 한 폭의 병풍을 연상케 하는 자수 보료를 방의 윗목에 깔아 늘 따뜻한 방에 손님이 머물도록 배려했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겨울이면 바람이 심해 온돌방의 온기가 쉬이 식기 때문에 집안의 귀한 어른들의 방에 보료를 깔아두는 문화가 있었는데, 여기서 귀한 어른이란 바로 사랑채를 찾은 손님들이었습니다. ‘손님은 왕이다’라는 요즘의 서비스 구호가 무색할 정도인데요. 사랑채 청지기 방에는 하인이 항시 손님을 위해 24시간 대기하고 불편함이 없도록 잠자리를 살폈습니다.



사랑채 문화 중 큰 한 축을 이루는 것이 문(文)을 중요시 하는 시대 흐름에 따른 격조 있는 모임입니다. 글짓기, 시화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시회’는 사랑채의 풍류를 고스란히 드러내는데요.


당시 상류 사회는 시가 생활화되어 있어서 마음의 안정을 얻고 정신적 휴식을 취하는 데 역할을 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거문고를 거나 퉁소를 불며 풍류를 즐겼다고 하는데요.


이를 통해 우리는 그림, 음악, 글이 함께 한 오감 만족의 문화가 바로 사랑채에서 뿌리를 내린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시회야말로 가장의 소양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것으로 손님이 끊이지 않는 곳은 바로 가장이 주도하는 이 풍류 모임의 영향이 컸습니다. 지역의 예술가와 문인들이 한 자리에 자주 모이는 곳. 이런 장소라면 결속과 친목의 장소를 넘어 한 지역 사회의 문화를 주도하고 트렌드를 창시하는 공간이라고 칭해야 할 것입니다.




한국에서 전해오는 옛말에 ‘사랑을 지킨다’는 게 있습니다. 언제인지 알 수 없는 손님의 방문에 대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추는 자세를 말하는 것이죠. ‘내 집에 오는 손님은 먼 친척, 남편의 벗이고, 가족의 벗이다. 술과 과일을 있는 대로 대접하라’고 옛 문헌에 기록되어 있으며 손님을 한두 번 박대하면 손님이 다시는 찾지 않을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단적인 예로 추운 겨울날 목화솜 비단 이불 안에 밥그릇을 넣어 갓 지은 밥이 식지 않도록 보살피는 행동을 들 수 있습니다. 혹여 손님상에 먼지라도 들어갈까 싶어 비단 조각보로 아름답게 만든 상보를 상에 덮어두는 세심한 배려 같은 것도 이 사랑채의 ‘섬김’ 문화라 할 수 있습니다.





술, 밥, 차. 이 세 가지가 조선 시대 사랑채를 찾은 손님들에게 제공되는 기본 코스입니다. 특히 집안 대대로 이어져 오는 비법으로 만들어진 가양주는 별미 중의 별미로 각 가정마다 술을 만드는 기술이 대단했다고 전해집니다. 집안이 가풍이 느껴지는 가양주에 곁들여지는 안주와 담백하지만 정갈하게 차린 끼니마다의 반찬 솜씨로 안주인의 손맛은 담장 밖까지 소문이 나는 게 일반적이었다고 하는데요. 사랑채에서는 요리를 하지 않고 안채 부엌에서 만든 음식으로 접대를 하는 것이 보통이라 담소를 나누는 건 가장이지만 그에 곁들여질 음식과 다과를 수시로 내는 건 안채를 책임진 여성의 몫이었습니다. 


술상, 찻상, 밥상을 번갈아 내고 최고의 음식으로 소홀함이 없이 준비하는 것을 원칙이었기 때문에(완벽한 서비스 정신으로) 안채의 안주인은 누구보다 바쁜 일상을 보낼 수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가장과 나누는 담소에 빠질 수 없는 것이 차 문화인데요. 잘 덖은 차에서 집주인의 안목과 취향이 한눈에 드러났고 향긋한 차 앞에서 나누는 한 편의 시로 세상 시름을 잊고 정서적 풍요로움을 만끽했던 것입니다.



사랑채의 구조

 


조선 시대 유교 문화에서는 안사람과 바깥 사람이 함께 할 수 없으므로 안채와 사랑채가 분리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연히 외부인인 손님의 방문이 이어지는 사랑채는 안채로부터 독립된 구조여야만 했습니다. 조선 시대의 독특한 주택 구조는 바로 이 사랑채 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사랑채는 안채와 시선이 차단되어야 했으므로 거리를 두거나 나무를 심어 물리적 분리를 하곤 했는데요. 물론 이렇게 독립된 건축물들을 구성하기 위해서는 재력이 담보되어야만 하는 일이었습니다. 상류층으로 갈수록 온전히 독립된 구조의 사랑채를 볼 수 있습니다. 이 같은 상류 주택에는 커다란 누마루가 있어서 대외적인 제례 의식 등을 치르기도 했다고 합니다. 사랑채에는 사랑방, 책방, 침방, 제청, 청지기방, 사랑정원 등 다양한 공간이 공존하며 문중의 의례, 손님 접객, 남성 중심의 가정 생활이 이루어지는 복합적인 멀티 플레이스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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